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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고지도

    부산 고지도(釜山古地圖)
    · 발행연도 : 19세기 후반
    · 발행처 : 부산 동래부
    · 용도 : 군현지도
    · 소장처 : 동아대학교 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채색 회화식 지도다. 산맥의 줄기를 매우 강하게 표현하여 마치 조감도를 보는 듯 하며 그 사이의 분지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영도를 절영도라 표기하면서 태종대를 별도로 작게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조도와 분도는 표기하지 않았다. 동래부에서 절영도와 태종대의 위치를 가늠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정도이다.

    영도 문화도시 아카이브 위원 김한근의 조사 자료 중 일부 발췌

    일제강점기 대평동 주택

    개항 이후 영도는 일본인의 이주와 함께 일본인 주택과 조선인 주택이 혼재된 공간이었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부산의 일본인전관거류지(중구, 동구, 서구 일대)와 인접하여, 영도의 일본인 이주어촌은 1910∼1920년에 이미 전국에서 제일 큰 규모였다. 대평동은 일본 어민의 어업전진기지였는데 이후 일본인전관거류지의 배후공업단지로 역할이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인구가 유입되고 토지와 교통시설이 점차 확충되었다. 1930년대 영도대교와 전철이 연결되었고, 도로와 건물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당시 대평동 주양식으로 일식주택과 전통주택이 있다.

    영도 문화도시 아카이브 위원 윤일이의 조사 자료 중 일부 발췌

    대평동 이씨 가옥

    영도 대평동에는 마당이 있는 1∼2층 일식주택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씨 가옥은 일식 단독주택으로 목조에 일식기와를 얹은 2층집이다.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지만, 건축대장에는 1954년 이전에 지어졌다고 한다. 주택은 각기둥을 세운 목조로 흙벽으로 메웠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일식 평기와이다. 1층은 ㄱ자형으로 큰방, 작은방, 부엌이 갓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가파른 목조 계단을 올라가면 2층은 一자형으로 큰방과 작은방이 있는데, 큰방에는 일본식 장식벽감인 도코노마가 설치되어 있다.

    영도 문화도시 아카이브 위원 윤일이의 조사 자료 중 일부 발췌

    대평스프링

    대평스프링이 있는 주변 거리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도로가 일식 맨홀 뚜껑이 지금도 덮혀 있다.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일식건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건축물대장에는 1963년 신축으로 기록). 주구조는 블록조이고 지붕은 개량기와인데 최근에 비가 새어서 비닐을 덮어둔 상태이다. 외벽은 전면부에는 시멘트를 거칠게 바르고 연한 황토색 페인트를 발랐다. 2층의 목재 창문틀과 쇠창살 그리고 1층의 우측 철문은 옛스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처음에는 주택 및 창고로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1층 전체를 공업사의 작업장과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영도 문화도시 아카이브 위원 윤일이의 조사 자료 중 일부 발췌

    부산항 해도

    1859년 측량 부산항 해도(釜山港 海圖)
    · 발행연도 : 1860년
    · 발행처 : 프랑스
    · 용도 : 해도
    · 소장처 : 개인(프랑스)

    1859년 영국군함 Acteaon호 존 와드 함장에 의해 측량되고 1860년 영국해군성에서 발행한 부산항 해도이다. 절영도를 처음 ‘Deer Island(사슴섬)’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봉래산에서 뛰노는 노루를 보고 사슴으로 착각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서양 해도를 보면 영도에 ‘Deer Island’가 부기된 것을 볼 수가 있다. 또한 간조와 만조시 해안선을 함께 표기하고 있으며 주변 수심을 표기하고있다.

    영도 문화도시 아카이브 위원 김한근의 조사 자료 중 일부 발췌

    대일본직업별명세도_부산부

    대일본직업별명세도_부산부
    · 발행연도 : 1930년 3월 8일
    · 발행처 : 일본 도쿄(東京) 동경교통사(東京交通社)
    · 용도 : 관광·교통 그림지도
    · 소장처 : 개인

    1930년 3월 일본 도쿄 동경교통사에서 발행한 일종의 관광 ・교통산업지도로 일종의 그지도이다. 영도의 경우 수산시험장, 일본경질도기주식회사, 목도유치원, 조선업과 철공업 등이 나타난다. 영도의 도로정비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청학동 방면의 간선 도로가 최초로 나타나 있다. 봉래동에서 청학동에 이 일대에 조선과 철강업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영도 문화도시 아카이브 위원 김한근의 조사 자료 중 일부 발췌

    박태문

    박태문은 영도를 배경으로 한 시를 다수 창작한 작로 196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밤의 편력」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박태문은 부산 지역의 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영도구 출생으로 학창시절과 결혼 초기를 진구 범천동 빈촌에서 보냈으며, 박태문의 묘가 영도구에 위치한다. 「무제 5」를 비롯한 다수의 시에 등장하는 ‘풀’은 민중의 삶, 특히 영도 사람들의 고된 삶을 모태로 하여 탄생한 시어라고 평해진다.

    영도 예인전 아카이브조사 자료 중 일부 발췌

    없어져서 많이 아쉽네요

    “1989-90년경인 것 같아요. 가족들과 태종대 자유랜드 놀이공원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영도의 유일한 놀이공원이었는데 없어져서 많이 아쉽네요.”

    자유랜드에서 제공자를 촬영한 사진

    지금은 없어진 추억의 장소

    “제가 지금 50 입니다. 위 사진은 아가씨때 태종대 놀이동산에 가서 찍은 사진이에요. 지금은 없어진 추억의 장소죠.”

    자유랜드에서 촬영한 제공자 본인의 사진

    소풍으로 자갈마당에

    “91년 친구들과 소풍으로 자갈마당에 간 것 같아요.”

    태종대 자갈마당에 소풍 갔던 제공자의 사진

    퐁퐁장에서 사진찍었어요

    “갓 돌이 지난 동생과 현재도 남아있는 서호연립, 보배연립 앞 퐁퐁장에서 사진찍었어요.”

    퐁퐁장에서 동생과 촬영한 제공자의 사진

    일제강점기 대평동 주택

    개항 이후 영도는 일본인의 이주와 함께 일본인 주택과 조선인 주택이 혼재된 공간이었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부산의 일본인전관거류지(중구, 동구, 서구 일대)와 인접하여, 영도의 일본인 이주어촌은 1910∼1920년에 이미 전국에서 제일 큰 규모였다. 대평동은 일본 어민의 어업전진기지였는데 이후 일본인전관거류지의 배후공업단지로 역할이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인구가 유입되고 토지와 교통시설이 점차 확충되었다. 1930년대 영도대교와 전철이 연결되었고, 도로와 건물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당시 대평동 주양식으로 일식주택과 전통주택이 있다.

    영도 문화도시 아카이브 위원 윤일이의 조사 자료 중 일부 발췌